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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중세 역사2
수차례 전쟁에서 불패 신화를 기록한 스위스는 자신감이 높아져 해외 영토에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그 지역은 바로 이탈리아 전쟁이 한창이던 이탈리아의 북부지역이었습니다. 스위스는 처음 1510년 프랑스 편으로 용병을 보냈으나 1512년 교황의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프랑스 연합과 교황 연합이 라벤나에서 싸우는 틈을 타 스위스는 밀라노를 정복했고 이탈리아에서 본국으로 물러난 프랑스는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어 이탈리아를 재침공했고 베네치아군은 노바라에서 스위스군을 에워쌌습니다. 프랑스군이 뒤이어 스위스를 공격했지만 수적 열세였던 스위스가 오히려 대승을 거뒀습니다. 남쪽의 이탈리아 북부 영토를 차지할 수도 있겠다는 단꿈에 젖어들 무렵 1515년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 국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즉위 후 곧바로 전쟁을 다시 일으켰고 그간 패배를 몰랐던 스위스군은 마리냐노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습니다. 프랑스와 스위스 용병을 벤치마크 한 독일 용병 란츠크네히트 그리고 베네치아가 연합해 무적이었던 스위스군을 무너뜨린 마리냐노 전투는 스위스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을 기점으로 장창으로 무장한 스위스 용병의 전술은 더 이상 잘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패배로 스위스는 역사상 처음 중립을 선포했습니다. 스위스는 1516년 프랑스와 영구 평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티치노 지역을 획득하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5년 뒤 프랑스와 추가로 맺은 복무 협약에는 프랑스의 정규군에 스위스 용병을 포함시킨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로써 스위스가 프랑스와 교황에게만 용병을 제공하게 되자 대신 독일 용병 란츠크네히트가 크게 부상했습니다. 프라스와의 평화 조약 및 복무 협약은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했지만 반대로 합스부르크와의 관계가 멀어지는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탈리아에 대한 야욕이 강했던 프랑수아 1세는 스위스 용병과 함께 파비아에서 합스부르크 카를 5세와 맞붙었습니다. 1525년에 일어난 파비아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군대는 신무기 화승총을 사용하여 스위스 용병을 무력화시켰습니다. 프랑스 및 스위스 용병은 합스부르크 군대에 비해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고 프랑수아 1세는 포로로 붙잡히고 또 전장에서 화승총이 등장함으로써 스위스 용병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습니다. 이탈리아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는 종교 개혁이 일어난 시기기도 하여 부패한 구교와 이를 비판한 신교 간에 종교 갈등이 높아져 가던 때였습니다. 종교 개혁의 대표적 인물로 독일에 마르틴 루터가 있다면 스위스에는 율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이 있었습니다. 급진적인 종교 개혁가인 츠빙글리는 가톨릭 세력과의 전쟁에서 1531년 전사했고 프랑스 출신이지만 프랑스 출신이지만 제네바에서 활동했던 칼뱅은 그곳의 지도자가 되어 엄격한 교리로 종교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칼뱅의 제네바는 종교적 박해를 피하기 위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종교 난민들 중에는 뛰어난 공예가, 금융가 등의 전문직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도시 발전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종교 갈등으로 인해 스위스에도 서로 종교가 다른 지역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종교로 인해 하나의 지역이 반으로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펜첼 주칸톤은 1597년 신교의 아펜첼 아우서로덴과 구교의 아펜첼 이너로덴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기존 주에서 반으로 갈라져 나온 주를 반주라고 하며 현재 스위스를 구성하는 26개의 주 중 6개가 반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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