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세계의 역사

스위스의 초기 중세시대 역사

꼬미야때미 2022. 6. 10. 15:27

목차



    스위스의 중세 역사1

    즉위 후 루돌프 1세는 자신의 황제 선출을 가장 반대했던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와 1278년에 전쟁을 벌여 그를 무릎 꿇렸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를 획득함으로써 가문의 본거지를 변방인 스위스에서 유럽 동쪽으로 옮기며 가문의 세를 단숨에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루돌프 1세는 자신의 아들인 알브레히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를 하사하였습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유럽의 가장 강성한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 1291년 루돌프 1세가 사망하자 이 기회를 틈타 스위스의 슈비츠, 우리, 운터발덴 지역의 대표가 뤼틀리 평원에 모여 자치권 회복을 위한 영구 동맹을 결성합니다.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란드가 네덜란드의 가장 대표적인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듯이 스위스 역시 이때 영구 동맹을 결성한 슈비츠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에 집행관을 보내 스위스를 통치했는데 이 집행관의 스위스에 대한 폭압을 배경으로 하여 지어진 이야기가 바로 빌헬름 텔 이야기입니다. 빌헬름 텔은 집행관 게슬러의 명령을 거역해 게슬러의 분노를 샀고 화가 난 게슬러는 빌헬름 텔에게 그의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두고 활로 쏴서 명중시켜 보라는 가혹한 처벌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실화는 아니지만 스위스들의 독립을 향한 저항 정신과 갈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로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자 1315년 스위스 동맹을 침공합니다. 3개 지역의 동맹군은 미리 대비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습니다. 이 승리 이후 스위스 다른 지역들도 점차 연맹에 가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322년 루체른, 1351년 취리히, 1352년 글라루스와 추크, 1353년 베른이 차례로 가입하여 총 스위스 연방은 8개 지역으로 늘어났습니다.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하여 요충지인 스위스를 순순히 포기할 오스트리아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다시 스위스를 침공했지만 1386년 젬파흐 전투, 1388년 네펠스 전투에서 연달아 스위스 연방이 승리하며 오스트리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스위스 연방 1415년 합스부르크가의 고향과도 같은 아르가우를 정복해 차지하고 스위스 연방은 아르가우 정복을 시작하여 점차 영토를 늘려나가 투르가우, 장트 갈렌 등을 차례로 편입했습니다.

    이렇게 스위스가 힘을 키우는 동안 스위스 서쪽에 있는 부르군트 공국 역시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동부에서 시작해 북쪽의 저지대까지 영토를 넓힌 부르군트 공국은 이웃 국가인 프랑스와 스위스 모두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부르군트 공국의 군주 용담공 샤를은 실패하긴 했지만 1476년 스위스를 침공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스위스는 서로 이해관계가 맞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이에 분노한 부르군트의 군주 용담공 샤를은 스위스를 재침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스위스는 모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독립을 지켜냈습니다. 이듬해에 샤를은 로렌지역의 낭시를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지만 로렌 공국과 힘을 합친 스위스군에 의해 패배했고 그는 전투 중 전사했습니다. 용담공 샤를의 죽음으로 부르군트 공국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기 시작해 후에 부르군트 공국은 합스부르크가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1499년 스위스를 침공했고 스위스 연방은 다시 힘을 합쳐 바젤 근처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찔렀습니다. 양측은 바젤 평화 협정을 맺었고 협정의 결과 스위스는 지긋지긋한 합스부르크가로부터 독립을 이루어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2년 뒤 바젤과 샤프하우젠의 연방 가입을 시작으로 1513년에 이르러 스위스 연방은 총 13개 주로 늘어났습니다. 14세기부터 시작된 합스부르크가 혹은 부르군트 공국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바로 농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였습니다. 장창으로 무장한 스위스 민병대는 오스트리아의 기병대를 무찌르며 처음 유럽에서 명성이 퍼졌고 민병대는 용병으로 발전해 백년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 우수한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고자 노력했고 용병 사업은 스위스의 주 수입원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