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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

스위스의 고대시대 역사

꼬미야때미 2022. 6. 10. 02:46

목차



    스위스의 고대 역사

    스위스에 기원전 30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를 지나 철기 시대의 대표적인 고고학 유적은 기원전 40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호상가옥입니다. 그중 기원전 450년 경 켈트족이 뇌샤텔 호수에 지은 호상가옥 마을 유적이 발견되었고 그 지역의 이름인 라텐의 이름을 따서 켈트인의 후기 철기 문화를 라텐 문화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 외에도 콘스탄츠 호수 등 여러 지역에서도 켈트인의 유적이 발굴되었습니다. 참고로 전기 철기 문화는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지역의 이름을 따 할슈타드 문화라 합니다.

    기원전 1세기에 접어들면 스위스에는 켈트족의 한 부류인 헬베티아인과 라에티아인들이 주를 이루며 살고 있었습니다. 라에티아인은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기원전 1세기 중반 중앙 고원 지역의 헬베티아인들은 게르만족의 침략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했지만 로마의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그들의 진출을 막고 돌려보냈습니다. 카이사르의 목적은 헬베티아인들이 사는 지역을 게르만족 침략을 완충지대로 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거치며 스위스는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습니다. 약 400년 간 로마의 지배는 그다지 강압적이지 않았고 스위스 지역은 문명화되었습니다. 로마 통치 기간 스위스는 5개의 지방으로 분할되었고 켈트어나 켈트 문화는 점점 라틴어와 라틴문화로 대체되어 갔습니다. 3세기 초부터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로마는 스위스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해 결국 서고트족이 로마를 침략하자 상실되었습니다. 로마군이 본국 방어를 위해 401년 스위스에서 철수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지배가 약화되어 갈 때쯤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알레마니족이 스위스 북부에서 침략해 들어와 후에 스위스에서 크게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스위스 서부는 부르군트 왕국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민족의 침략이 미치지 못한 지역은 로마화 된 사람들이 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어느 정도 현대 스위스의 언어 구성이 결정되었습니다. 게르만족인 알레마니족이 사용하는 독일어, 부르군트 왕국이 갈리아 화 된 로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스위스 서부에 살게 하면서 서부는 프랑스어, 이민족의 침략이 미치지 못했던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사용한 이탈리아어와 로망슈어로 지역별 언어가 결정됩니다. 게르만족이 세운 중세 국가 중 최강국은 프랑크 왕국이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갈리아 기방을 정복 후 6세기에 부르군트와 알레마니도 정복했습니다. 스위스는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 놓여있었고 프랑크 왕국은 샤를먀뉴 때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샤를마뉴 사후 프랑크 제국은 손자들에 의해 843년 3개로 분열되었습니다. 917년 스위스 동부와 중부는 동프랑크 왕국의 슈바벤 공작령, 당시 서부는 상부 부르군트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분할되어 통치받던 스위스는 103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트 2세가 부르군트 왕국을 병합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에 통합되었습니다.

    9-10세기 이민족의 침략이 잦았던 시기였습니다. 마자르족이 바젤과 장트장크트 갈렌을 침략했고 사라센은 발레 및 생모리스 수도원을 약탈했습니다. 955년 레흐펠트 전투에서 독일 국왕 오토 1세가 마자르족에게 승리한 후에야 이민족의 침략이 잦아들었습니다. 당시 사라센을 격퇴하는 데 베르나르 수도사가 활약했고 그는 전쟁 후 스위스의 한 고개에 여행자나 순례자를 위한 구호소를 설치했습니다. 그를 기리며 그 고개의 이름은 세인트 베르나르 고개가 되었고 그곳에서 구조견 역할을 했던 견종 세인트 버나드가 후에 스위스의 국견이 되었습니다.

    스위스인들이 현재 주로 믿고 있는 종교인 기독교는 로마 군인에 의해 처음 전래되었고 로마 시대 이후 스위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장 갈입니다. 장 갈은 아일랜드 출신으로서 같은 아일랜드 선교사 성 골롬바노를 따라 선교 활동을 위해 유럽 대륙으로 떠났고 그는 7세기 스위스 동부 지역에 홀로 머물려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머물었던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 장트 갈렌이 되었고 장트 갈렌 수도원은 9-11세기 독일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11세기 초 스위스를 편입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는 주로 독일 국왕들의 차지였습니다. 독일 국왕의 선출과 지방 영주들의 힘이 강하여 보통 왕권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스위스는 신성로마제국에 편입되어 있긴 했지만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크게 간섭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보이 백국, 체링겐, 합스부르크, 키부르크 가문과 같은 지방 영주들이 스위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습니다.

    11세기부터 스위스는 경작 기술 발전으로 인구가 크게 늘어났고 12세기와 13세기에는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도시들이 생겨났습니다. 교역과 도시 발전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이탈리아와 스위스 루체른을 연결하는 고타드 패스의 개통이었습니다. 1220년 우리 지역과 슈비츠 지역이 이 길의 개통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아 성장한 지역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요충지인 슈비츠를 1240년 제국 직할령으로 지정하여 우리와 슈비츠는 모두 신성로마제국의 직할령이 되었습니다.

    1254년부터 약 20년간 독일 국왕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두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세력들 간의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대공위 시대라 불리는 이 기간에는 스위스는 높은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대공위 시대가 끝나면서 자치는 위태로워졌습니다. 대공위 시대는 교황의 중재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며 진정되었습니다. 독일의 제후들은 유력 가문 출신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선출되는 것을 모두 꺼렸으므로 스위스 아르가우 지역의 미약했던 가문은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가 황제로 선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