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근대 역사2 나폴레옹 전쟁 이후 1815년 빈 회의 결과 스위스는 영세 중립국임이 인정되었고 발레, 뇌샤텔, 제네바가 스위스 연방에 편입되어 현재 스위스 국경과 유사한 형태를 갖췄습니다. 영세 중립국의 지위는 스위스의 외교적 노력도 있었지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어느 한 국가가 스위스를 단독으로 차지하여 세력 균형이 무너질까 두려웠기 때문에 스위스를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스위스는 1815년 본격적으로 과거의 각 주들이 자율성을 가졌던 구체제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전파한 혁명의 사상은 스위스인들에게 많이 뿌리 내려져 있었습니다. 약한 연방정부를 선호하는 즉 과거 구체제로 선호하는 보수주의자들에 대항해 자유주의자들은 계속적인 투..
스위스의 근대 역사1 16세기 동안의 종교 갈등은 17세기 초 30년 전쟁으로 폭발했습니다. 유럽 최초의 세계 대전이라 일컬어지는 30년 전쟁은 여러 국가들이 종교적 목적과 실리적 목적을 가지고 참전했습니다. 프랑스가 대표적인 실리적 이유로 참전한 국가로서 가톨릭 국가였지만 합스부르크가를 견제하기 위해 신교 측으로 참전했습니다. 스위스 역시 실리적 목적을 가지고 이 전쟁을 대응했습니다. 대응의 방식은 프랑스가 참전한 것과 달리 스위스는 이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내부에 다른 목소리도 있었지만 결국 스위스는 중립을 선언했고 혹시 모를 침략을 대비해 약 36,000명의 군인을 국경 지대에 파병할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 결과 큰 피해 없이 전쟁을 피해 갈 수 있었고 거기에 더..
스위스의 중세 역사2 수차례 전쟁에서 불패 신화를 기록한 스위스는 자신감이 높아져 해외 영토에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그 지역은 바로 이탈리아 전쟁이 한창이던 이탈리아의 북부지역이었습니다. 스위스는 처음 1510년 프랑스 편으로 용병을 보냈으나 1512년 교황의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프랑스 연합과 교황 연합이 라벤나에서 싸우는 틈을 타 스위스는 밀라노를 정복했고 이탈리아에서 본국으로 물러난 프랑스는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어 이탈리아를 재침공했고 베네치아군은 노바라에서 스위스군을 에워쌌습니다. 프랑스군이 뒤이어 스위스를 공격했지만 수적 열세였던 스위스가 오히려 대승을 거뒀습니다. 남쪽의 이탈리아 북부 영토를 차지할 수도 있겠다는 단꿈에 젖어들 무렵 1515년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 국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스위스의 중세 역사1 즉위 후 루돌프 1세는 자신의 황제 선출을 가장 반대했던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와 1278년에 전쟁을 벌여 그를 무릎 꿇렸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를 획득함으로써 가문의 본거지를 변방인 스위스에서 유럽 동쪽으로 옮기며 가문의 세를 단숨에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루돌프 1세는 자신의 아들인 알브레히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를 하사하였습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유럽의 가장 강성한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 1291년 루돌프 1세가 사망하자 이 기회를 틈타 스위스의 슈비츠, 우리, 운터발덴 지역의 대표가 뤼틀리 평원에 모여 자치권 회복을 위한 영구 동맹을 결성합니다.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란드가 네덜란드의 가장 대표적인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듯이 스위스 역시 이때 ..